발렌시아가 장인 정신의 시작
브랜드의 창립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1895년 스페인 북부의 어느 작은 항구 도시(헤따리아)에서 태어납니다. 발렌시아가는 다른 브랜드 창립자 크리스찬 디올, 이브 생 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와 같이 어릴 때 부유한 생활은 하지 못했습니다. 항구도시였기에 아버지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옷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일을 도와 옷을 만들었습니다. 6살 때는 자신의 고양이를 위한 코트를 직접 만들 정도로 실력이 남달랐습니다. 유럽 국가 중 남쪽에 위치한 스페인의 북부 항구는 유럽의 돈 많은 귀족들이 휴양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장소였습니다. 아버지의 작은 배는 귀족들을 유람선까지 운송도 했고, 어머니는 귀족들의 옷도 수선하여 귀족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발렌시아가 1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섯 형제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를 도와 적극적으로 옷 수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어느 날 자신이 수선하는 옷들이 한 사람에게 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녀는 토레스 가문 후작 부인이었습니다. 11살 발렌시아가는 패션에 관심이 많던 토레스 가문의 후작 부인을 보고 그녀를 의상 감각에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발렌시아가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빌려만 준다면 똑같이 만들어 보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에 옷과 원단까지 빌려주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11살 발렌시아가는 원본보다 더 높은 퀄리티의 옷을 그녀에게 전했고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그녀는 직접적으로 후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12살 스페인 패션계 입문
후원에 힘입어 발렌시아가는 12살 어린나이에 집을 떠나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의 휴양도시였던 산 세바스찬의 부띠끄에서 수습생으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패션전문 부띠끄에서 일한 그는 실려을 키워감은 물론이고 토레스 가문 후작 부인의 인맥으로 맞춤복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휴양도시였기에 귀족과 상류층의 예술적 취향을 보며 발렌시아가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예술적 감각을 키워나갑니다. 16살이 되던 해 수습과정에서 재단사들에게 인정을 받고 테일러샵으로 스카우트됩니다. 이후 프로 재단사 실력을 웃돌게 된 발렌시아가는 세바스찬에 위치한 루브르 백화점 드레스 메이킹 살롱에 들어가게 됩니다. 2년 만에 그는 막내로 시작하여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백화점 최고의 자리에서 패션뿐만 아니라 백화점의 유통경로과 고객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알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재봉과 디자인에 실력을 쌓던 그는 이제 패션에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그가 22세 되던 해 1917년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했고 스페인에서 왕족과 귀족을 상대하는 스페인 브랜드 였습니다. 10년 동안 성공한 디자이너로써 삶을 이어졌지만 1936년 운이 없게도 시대가 변하여 제2 공화국 선언으로 왕족과 귀족은 몰락하고 스페인 내전까지 발생하여 발렌시아가의 첫 번째 브랜드는 포기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민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스페인 디자이너
사실 발렌시아가는 영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었기에 영국의 드레스 제작으로 유명했던 노르만 하트넬과 셀프릿지 백화점에 지원했지만 외면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패션의 나라 프랑스 파리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그는 바로 동업자들과 프랑스 파리에서 1937년 07월 07일 42세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오픈하게 됩니다. 스페인 디자이너였던 그는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을 디자인에 적용하였고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새로운 디자인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에도 그는 중립국 스페인 국적이었기에 미국을 오가며 디자인에 집중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디자인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바로 활동성을 더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의 문화와 활동성을 더한 디자인으로 다른 브랜드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디자인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발렌시아가와 지방시
1960년부터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발렌시아가는 1968년 전 지점 문을 닫게 됩니다. 기존에 화려하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정교함을 갖춘 디자인은 점점 인기가 적어지고 심플한 기성복 패션이 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해 발렌시아가는 패션계를 은퇴하게 됩니다. 그후 4년 뒤에 발란 시 아가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겐 훌륭한 협업관계였던 위베르 드 지방시가 있었습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는 젊어서부터 발렌시아가를 존경해왔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모시던 스승이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매장이 닫기전 VIP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 줄 것을 권했고, 발렌시아가의 뛰어난 기술자들에게도 지방시를 찾아갈 것을 권했을 정도로 이 둘의 신뢰는 컸습니다. 이렇게 스승밑에서 그는 발렌시아가의 아이디어들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지방시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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