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야기 / / 2023. 1. 1. 15:18

입 생로랑의 탄생과 다시 시작된 브랜드 역사

Aleksandra Rupar (unsplash.com)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은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습니다. 생 로랑의 초기 디자인은 프랑스 파리 마르소 5번가에 있는 그의 오래된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는 Musee Yves Saint Laurent Pairs입니다. 그곳에 전시된 그의 초기 디자인은 잘라낸 직물로 옷을 입은 스케치와 종이 인형으로 구성됩니다. 이렀듯 이브 생 로랑은 어릴 때부터 디자인과 패션에 모든 관심을 가졌습니다.

 

1953년 이브 생 로랑이 16세가 되던해 현재 울마크 상으로 알려진 국제 양모 사무국 대회에 참가했고, 현재에도 유럽을 대표하는 브랜드의 창립자들인 위베르 드 지방시와 크리스찬 디올을 포함한 심사위원단은 젊은 디자이너 생 로랑에게 3등 상을 수여했습니다. 같은 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인 피에르 발망과 위베르 드 지방시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드레스 부분에서 이브 생 로랑에게 1위를 수여했습니다. 당시 코트 부문에서는 독일의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1위를 수상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과 수상자 대부분의 브랜드는 현재까지도 유럽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작품은 패션계에서 빠르게 유명해졌습니다. 디올은 생로랑의 디자인 스케치를 본 후 그의 젊은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1955년 18세의 나이로 디올 하우스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디올

디올(Dior) 하우스내에서 생 로랑의(Saint Laurent)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생 로랑은 1956년 Le bal des tetes라는 의상 무도회를 위한 머리 장식 디자인과 같은 액세서리까지 더 많은 책임을 맡게 됩니다. 1957년 디올의 조수로 승진하여 각 컬렉션마다 약 40벌의 드레스를 디자인하며 디올 내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크리스찬 디올은 심장마비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1세의 나이에 생 로랑은 퀴튀리에(대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의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어린 시절 그의 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1958년 그의 첫 번째 디올 쇼는 기존 크리스찬 디올이 디자인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통기성 있는 실루엣으로 여성복에 보다 유동적인 형태를 부여했습니다.

 

디올에서 열린 생로랑의 첫번째 컬렉션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1960년 생로랑은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정신건강에 큰 타격을 입었고 훈련 캠프 기간 동안만 훈련을 받았고 결국 정신 쇠약으로 입원을 하게 됩니다. 결국 디올에서는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이너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의 디자이너 마르크 보앙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브 생 로랑 패션 하우스의 탄생

생 로랑은 군대에 있는 동안 디올로부터 해고되어 계약 위반으로 생 로랑에게 지불한 680,000프랑과 그의 동성 연인인 피에르 베르제의 70,000프랑과 투자를 협상한 Jesse Mack Robinson과 함께 1년 만에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됩니다. 1962년 1월 첫 번째 컬렉션에서 생로랑은 해군 제복에서 영감을 받은 여성용 코트를 선보였습니다. 생로랑은 이렇게 남성기성복이나 다른 분야의 의상을 파격적으로 여성의 몸에 맞춰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1963년 A.M 카상드르의 의해서 현재까지도 브랜드의 상징적인 Yves Saint Laurent(YSL) 로고가 탄생하게 됩니다. 1966년 생 로랑은 여성을 위한 Le Smoking 턱시도 슈트를 디자인하여 선보였고 이는 남성복을 여성복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패션계에서 혁명을 일으키면서 생로랑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첫 매장은 젊은 창작자들이 살고 번성했던 파리의 일부인 세느 강 왼쪽 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리브 고슈(Rive Gauche)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1969년 매장 오픈쇼는 여성 기성복을 성공적으로 출시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많은 연예인과 유명 모델이 오픈 행사에 참여했고, 고객들이 옷을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당시 샤넬과 비교되기 까지 하였습니다. 생 로랑의 첫매장 리브 고슈라는 단어는 현재까지도 생 로랑의 인기 있는 가방에서 볼 수 있는 주요 문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의 영향

"저는 꿈에 그리던 모든 나라에 가봤습니다. 장소나 풍경에 녹아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본 다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뿐입니다" - 이브 생 로랑-

 

생로랑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장소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생로랑의 컬러에 영향을 받은 건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의 여행이었습니다. "마라케시 이전에는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저에게 색을 가르쳐 주었고 저는 그 빛, 무례한 혼합 및 열렬한 발명품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생 로랑이 얘기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의 옆에는 연인 피에르 베르제외에도 디자인 파트너인 LouLou de la Falaise와 Betty Cartroux였습니다. LouLou de la Falaise는 브랜드의 거칠고 야생적인 측면에서 생로랑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반면 Betty Cartroux는 세련되고 중성적인 영향으로 생로랑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재의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은 공식적으로 2002년 자신의 이름의 생 로랑 하우스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생 로랑에는 디자인 분야에서 주목받는 디자이너들이 레이블을 이끌었습니다. 작고한 Alber Elbaz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세 시즌 동안 여성 기성복을 디자인했습니다. Berge는 1997년 Hedi Slimane 컬렉션 디렉터 및 아트 디렉터를 임명했으며 Slimane는 CEO를 떠나기 전에 YSL 리브 고슈 홈므(Rive Gauche Homme)를 다시 출시했습니다. 1999년 구찌가 브랜드의 대주주 지분을 인수했을 때 톰포드가 기성복을 이끌었고, 생 로랑은 꾸뛰르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2004년 톰포드가 자신의 라인을 위해 케링 그룹을 떠났을 때 이탈리아 디자이너 Stefano Pilati가 인수하여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사망할 때까지 브랜드를 이끌었습니다.

 

2012년 생 로랑(Saint Laurent)의 모회사인 케링이 Slimane를 레이블의 크리에이트브 티렉터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브랜드를 부활시키기 위해 로고에서 Yves를 과감하게 삭제했습니다. 이는 생 로랑을 부활시켰고 2016년 자리에서 물러나 현재는 Anthony Vaccarello가 생로랑의 크리에이트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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