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오 구찌 가업과 벨보이가 된 구찌
구찌는 역사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구찌도 다른 유럽 브랜드처럼 창립자의 이름을 바탕으로 브랜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창립자는 구찌오 구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GG로고는 창립자 구찌오 구찌의 이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구찌오 구찌는 1881년 관광과 패션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대대로 밀짚으로 모자를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찌는 다가올 미래에는 밀짚모자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대로 내려온 밀짚으로 모자 만드는 기술을 배우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16살이 되던 해 영국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영국 런던으로 건너온 구찌오 구찌는 먼저 영국의 5성급 호텔인 사보이 호텔을 찾아갔습니다. 사보이 호텔은 5성급 호텔답게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가장 럭셔리한 호텔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사보이 호텔은 세계 각지의 상류층이 즐겨 찾는 호텔입니다.
사보이 호텔에서 구찌오 구찌가 했던 일은 벨보이였습니다. 벨보이로 일하며 상류층과 귀족, 신사들의 입는 것과 지니고 있는 액세서리를 보며 유럽 상류층의 문화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사보이 호텔에서 그가 벨보이로 일하며 하루 중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건 상류층의 가방이었습니다. 매일 다양한 스타일의 가방들 보며 구찌오 구찌는 상류층을 위한 고급 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상류층의 생활, 패션을 관찰하며 벨보이로 5년 동안 일한 구찌오 구찌는 그가 생각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 피렌체로 돌아갑니다.
다시 돌아온 이탈리아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역사깊은 가죽 공방 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엔 과거에도 현재에도 세계 최고의 가죽 장인들이 모여있습니다. 구찌오 구찌는 피렌체의 가죽 생산업체 프란지(Franzi)라는 가죽 생산업체의 도제로 들어가 가죽 공예 기술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는 무려 19년간 기술을 배웠습니다. 1921년 40살이 된 그는 5년간 벨보이로 일하며 경험한 상류층의 문화와 패션과 세계 최고의 가죽 장인들에게 19년간 배운 가죽 공예 기술을 바탕으로 피렌체에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매장 G.GUCCI를 오픈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자동차보다 말이 대중의 교통수단이었기에 구찌오 구찌는 승마용품 위주의 가죽 제품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이후 가방과 신발, 액세서리로 확장을 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는 패전국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출제한으로 원자재 수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자재 수급과 가죽 공예 장인들의 혁신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아들 알도 구찌는 기회를 찾게 됩니다. 제한이 없었던 일본산 대나무에서 구찌의 피렌체 장인들은 대나무를 성형하는 특허방법을 탄생시킵니다. 이 방법으로 오늘날에도 대나무 손잡이 생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찌 뱀부 백의 탄생입니다. 대나무를 활용한 혁신적인 가방 뱀부백은 구찌의 시그니처가 되었습니다.
구찌의 미국진출과 가문의 몰락
1953년 세계대전이후 알도 구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본격적인 확장을 하게 됩니다. 미국 첫 매장의 바로 뉴욕 58번가 사보이 호텔에서 오픈을 하게 됩니다. 구찌는 뉴욕에 진출한 최초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됩니다. 그해 창립자 구찌오 구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알도 구찌와 로돌프 구찌가 50%씩 경영권을 나누어 공동 경영을 하게 됩니다.
1983년 알도 구찌와 루돌프구찌와의 공동 경영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고 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구찌의 새로운 주인을 발표하는데 첫째 알도 구찌의 아들이 아닌 셋째 로돌프 구찌의 아들 마우리초 구찌였습니다. 결국 알도 구찌의 아들 파올로 구찌는 자신의 이름을 딴 파울로 구찌라는 브랜드를 만들게 됩니다. 단지 구찌의 명성으로 만든 브랜드이기 때문에 잘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렴한 파울로 구찌의 저렴한 품질은 구찌의 명성에 타격을 주게 됩니다. 이에 알도 구찌는 자신에 아들 파울로 구찌에게 아버지로서 한소리를 했고 파울로 구찌는 아버지 알도 구찌의 탈세 혐의 자료를 모아 신고하기까지 이릅니다. 결국 아들로 인해 알도 구찌는 80세에 교도소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마우리초 구찌도 떨어지는 매출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1989년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의 뉴욕 지사장 돈 멜로를 구찌의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습니다. 돈 멜로는 구찌의 새로운 디자인 팀을 꾸렸고 훗날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당시 29세의 디자이너 톰 포드(Tom Ford)가 디자인팀에 합류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도메니코 데 솔레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습니다. 이로써 구찌의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레인에 본사를 둔 투자 회사 인베스트코트는 1987년부터 구찌의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1989년 인베스트코프는 구찌 주식의 50%를 매입했고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의 보유한 50%의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회사의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로써 구찌가문은 구찌 브랜드 경영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구찌의 새로운 시작
구찌가문의 몰락과 함께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면서 디자인 팀에는 29세의 톰 포드가 합류하게 됩니다. 이후 톰 포드는 뉴욕을 대표하는 천재 디자이너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의 감각으로 5년 뒤 구찌의 패션, 액세서리, 광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톰 포드는 시대를 앞서 구찌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도발적이고 섹시한 연출로 다시 한번 구찌를 정상의 자리로 오르게 만듭니다. 10년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10년간 구찌를 이끌고 드디어 2002년 톰 포드는 구찌의 부사장이 됩니다. 기쁨도 잠시 2004년 PPR그룹(현재 케링)이 구찌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케링은 많은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그룹입니다. 그들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명품 브랜드 보테가, 발렌시아가, 생로랑, 알렉산더 맥퀸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케링의 경영진은 구찌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톰포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케링과 톰 포드의 갈등은 악화되어 톰 포드는 구찌를 나오게 됩니다.
당시 구찌 CEO의 연인인 프리다 지아니니가 톰 포드를 이어 구찌를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그도 연인이자 남편인 CEO와 케링그룹에 의해 동반 퇴출됩니다. 그리고 현재 구찌의 위상을 다시 올린 알렌산드로 미켈레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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