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야기 / / 2023. 1. 2. 18:05

크리스찬 디올 패션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다

Erika Beautydea(Pixabay.com)

예술적 감각의 시작

크리스찬 디올은 1905년 01월 21일 프랑스 서부 노르망디 지역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생활을 했는데 정원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어머니는 부유한 만큼이나 정원을 가꾸는 취미를 가졌고 패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크리스찬 디올 또한 패션과 예술에 그리고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래 남자이아들과 달리 섬세한 취미를 가졌던 크리스찬 디올 예술가의 꿈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취미와 꿈을 가진 크리스찬 디올을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좋게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크리스찬 디올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하여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길 바랬습니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치학과로 진학을 합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라서 그런 걸까요. 크리스찬 디올은 예술과 그림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생활동안에도 예술과 관련된 문화와 갤러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는 크리스찬 디올을 위해 아트 갤러리를 열어주게 됩니다. 하지는 이러한 아들의 지원은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1929년에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지속된 경제 대공황은 크리스찬 디올의 아버지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회사는 결국 파산하면서 집안의 모든 것이 팔려나갔고 크리스찬 디올의 집도 순식간에 경제 흐름에 따라서 몰락하게 됩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갤러리 또한 운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위기에서 성장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크리스찬 디올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동안 배운 드로잉 실력으로 디자인 하우스에 그림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패션과 예술적 감각 덕분에 그의 그림은 업계에서 빠르게 알려졌습니다. 1938년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디올은 로베르 피게에 눈에 띄고 그는 크리스찬 디올을 회사의 수습 디자이너로 채용하게 됩니다. 드디어 취직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오던 크리스찬 디올은 다시 한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터졌고 디올은 바로 프랑스 남부지역에 입대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는 1941년 군 복무를 마치고 파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군복무전 그의 디자이너 경력을 살려 뤼시앵 를롱 부티크에 취직해 일하기 시작합니다. 뤼시앵 를롱은 고급 맞춤복 시장의 단가를 낮춰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밑에서 또다시 성장하는 크리스찬 디올은 8년간 보조로 일했고 한때는 피에르 발망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성공적인 브랜드 런칭

1946년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직물회사인 부사크의 사장인 마르셀 부사크를 만나게 됩니다. 디자이너로써 유명세와 실력을 쌓고 있던 디올을 부사크사의 브랜드의 책임자로 올 것을 제안했지만 자신의 브랜드 런칭을 하고자 했던 크리스찬 디올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대신 마르셀 부사크 사장에게 자신의 브랜드 런칭에 투자를 제시했습니다. 마르셀 부사크 사장은 이 제안을 바로 수락하고 크리스찬 디올 41세에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게 됩니다.

 

마르셀 부사크 사장의 투자로 브랜드 런칭은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1946년 12월 06일 파리 몽테뉴 거리 30번지에 크리스찬 디올 부티크(매장)을 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안된 시기 였기에 여성들은 전투복 스타일의 딱딱한 복장을 입었습니다. 얼마뒤인 1947년 02월 12일 첫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서 크리스찬 디올의 혁신적인 디자인이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라고 크리스찬 디올이 자신있게 얘기 했듯이 첫 패션쇼에서 디올은 여성의 둥근 어깨 라인을 돋보이게 하고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스커트로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라인을 선보입니다. 그래서 첫 패션쇼를 New Look(뉴룩)이라고 부르게되며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뉴룩은 파리의 여성은 물론이고 영국 왕실에서도 구했을 정도로 크리스찬 디올의 브랜드 컬렉션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성공적인 미국 진출

크리스찬 디올의 첫 패션쇼의 성공에 이어 그는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향기가 필요하다"라고하여 퍼퓸 크리스찬 크리스찬 디올을 설립하고 향수 제작을 시작합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정원을 가꾸며 많은 꽃의 향기를 경험했던 그는 여성이 좋아하는 향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미스 디올"을 발표하고 이 향수는 패션에 이어 대성공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디올은 미국진출을 하게됩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디자인적 감각으로 브랜드 인지도는 프랑스 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에 미국 진출에서도 성공하게 됩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판매수익 절반이 미국에서 나올 정도로 미국에서의 인기가 굉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의 성공은 프랑스 성장에 기여하게됩니다. 1951년에는 프랑스 전체 수출액의 50%가 크리스찬 디올에서 나올만큼 프랑스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는 1957년 디자이너중 최초로 타임지의 표지로 장식하게 될 만큼 유명해집니다. 이미 이전에 만들어진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이 못해낸 일들을 크리스찬 디올이 이뤄냅니다. 하지만 크리스찬 디올은 1957년 10월 10주년을 앞두고 5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짧지만 그가 이뤄낸 업적으로 패션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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